네번째 도예전_이정훈 투각도자기展_2013

 

2013 the 4th Solo Exhibition by Jeong Hun, Lee

 

 

전시기간 2013. 3월 12일 - 3월 24일

전시장소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갤러리7

 

 

 

드러냄과 감춤, 그 경계 위에서


- 이정훈의 네 번째 전시에 즈음하여

 

집에 들어오는 우편물의 대부분이 전시 소식을 알리는 도록이다. 미술에 관한 일을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다. 온종일 밥벌이로 시간을 허송하고 돌아오는 길, 우편함에 전시 도록이 꽂혀 있으면 마음에 위로가 찾아든다. 누군가 이 종이뭉치를 남기기 위해 적지 않은 물질과 시간을 바쳤을 걸 생각하면 마음 한 구석이 저려오기도 한다. 모든 '전시'에는 비애가 있다. 모든 작가들은 생(生)을 바쳐 작품을 공개하게 되어 있다. 누군가에게 감상이고 취향이고 여가이고 수집인 행위가 작가라는 이름의 누군가에겐 운명과 같다. 세상에 없는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도 버거운 일이지만, 그것들을 모아 전시를 한다는 건 더욱 힘들다. 작가라면 누구나, 이 짓을 그만둬야지 고민하고 슬퍼하고 자책하고 분노해보지만 결국 깨닫게 된다. 이 일에는 대책이 없다는 걸, 빼도 박도 못한다는 걸, 이렇게 살 수밖에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소설가 김훈이 '밥벌이의 지겨움'을 토로했듯이 어느 시대, 어느 공간에나 작가들은 '작업의 지겨움'을 말한다. 입으로는 쉬고 싶다고, 이젠 정말 그만두고 싶다고 말하지만 머리와 몸이 온통 작업으로 향하는 이들을 가리켜 우리는 '작가'라고 부른다. 이것이 작가의 숙명이다. 여기에는 동서고금이 따로 없다.

 

도예작가 이정훈이 전시를 연다. 네 번째다. 그만큼의 세월이 도자의 겉과 속을 스치고 파고들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의 작업을 지켜보았으니 이 글도 네 번째다. 혁명을 꿈꿔도 모자랄 미술이 제도화, 아니 세속화되어 평범한 아름다움으로 전락해버린 세월 속에서 삶의 표정을 담아 작업하겠다는 작가의 곁을 지킨 시간이었다. 자유로운 듯 보이지만 세상과 다를 바 없는, 위계와 권력의 편협함으로 점철된 미술계에서 우리 두 사람이 견뎠다는 얘기일 테니 술잔을 부딪쳐도 좋을 것 같다. 그것이 미술이든, 다른 일이든, 자고로 계속하는 자에게, 오래하는 자에게 세상은 말을 거는 법이다. 우리는 이 일을 계속해야만 한다.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생각하는 듯하다. 미술이란 고결하고 순결한 것이라고. 하지만 이 말은 틀렸다. 미술은 고된 노동이다. 화폐를 벌어야 하는 직업이다. 작업실은 일터요, 밤샘 작업은 과로이며, 작품은 돈으로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의 고통은 직업병이고, 그의 죽음은 자연사가 아니라 산재(産災)이다. 그런데 세상은 이를 방관한 채 미술을 감상과 평가의 시선으로 덮으려 한다. 작가란 응당 가난해야 한다는 통설이 아무렇지 않게 도처에 나돈다. 작가의 삶은 원시시대 동굴 벽화를 그리던 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작가란 언제, 어디서나 세상의 보편적인 삶의 방식을 반납하고 불안정과 위태로움 속에 거할 때 주목받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이제야말로 그런 세상의 철없는 정의를 돌려세울 때다. 그리고 이렇게 요구해야 한다. 미술을 건성으로 바라보지 말라고, 동시에 미술을 위하는 척 신화의 자리로 내몰지 말라고, 대신 미술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제대로 직시하라고 말이다. 이정훈의 도자(陶瓷) 작업을 지켜보면서 생각했다. 작가로 살기 힘든 환경에서 그의 작업이 미술의 골기(骨氣)를 잃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미술조차 유행을 타는 현실 속에서 미술이 지켜야 할 감정선을 지킬 수 있었던 힘의 근원은 어디에 있을까. 그건 역으로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발산하지 않아서일 것이다. 미술이란 어떤 재료를 가지고 무엇을 이야기하려 했는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감정을 극도로 드러내거나 그 기미조차 감지하지 못할 때 아름답다. I, Me, My, Mine…… 나라는 존재를 격렬하게 표출하는 어수선한 작업들 속에서 이정훈이 빚은 도자기는 자아를 갈기갈기 찢어 꼭꼭 숨겨놓았기에 믿음이 간다. 나를 버림으로써 미술의 도(道)로 나아가는 길. 미술이 가야 할 길은 바로 여기에 있다.

 

슬픈 그릇. 버려지고 버려지는 슬픔 끝에 간택되어서일까. 나에게 도자기는 늘 이렇듯 서럽게 다가온다. 비어 있는 공간에 슬픔이 차올라 당장이라도 터질 것만 같다. 그런데 이 그릇이 더욱 슬픈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현란한 속도를 자랑하는 세상과 미술의 변화 속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버티는 모습은 참으로 눈물겹다. 미술이라는 라벨이 붙은 모든 작업이 그렇지 않겠냐마는 나는 도자기만큼 '시간'의 내성을 보유한 건 없다고 믿는다. 대부분의 작업이 작가의 몸에서 떨어지는 순간 완성을 말하지만, 오직 도자만큼은 뜨거운 불구덩이에서의 시간을 또다시 견뎌야 하는 숙명을 지닌다. 그 시간을 감내해야 도자는 자신의 몸을 갖추게 된다. 제 몸 여기저기에 도공의 상상력을 덕지덕지 붙인 채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않고 정좌해 있는 모습은 실로 우아하다. 그것이 고귀하든 소탈하든, 그 모습에는 거역할 수 없는 존엄이 있다. 애나 어른이나 손이 아닌 눈으로 도자를 어루만지는 데는 이유가 있다. 아름다움이라는 감정을 넘어 시간의 기억이 리얼하게 배어 있다는 본능적인 체감 앞에서 주춤거리기 때문이리라. 그것이 바로 스펙터클한 우리 시대에 도자의 생명력이 면면히 이어져오는 까닭이다. 네 번째 전시에서 이정훈의 도자는 작가로서의 갈망을 빚는 것을 넘어 이 지점에 다다른 듯하다. 작가의 손에서 잉태한 피붙이들의 생김생김과 타고난 성품을 논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이정훈의 지난 시간은 비평의 대상이 될 만하다. 누가 그랬던가. 시는 언어의 음악이라고. 나는 이렇게 말하려 한다. 도자는 흙의 음악이라고. 무엇을 노래하는지 알아차릴 수 없는 흥얼거림 속에 삶의 희로애락을 차곡차곡 쌓아놓은 천상의 음악이라고.

모두가 좋은 작업을 보고자 한다. 좋은 작업의 기준이란 여러 가지일 테지만, 나는 하나를 포기하는 대신 다른 하나를 얻는 방법을 아는 작업을 그중 하나로 꼽는다. 작가의 내밀한 자아를, 시대를 관통하는 주제를, 영원히 변치 않는 예술의 목표를 드러내는 작업, 반대로 그것을 철저히 감추는 작업에서 희열을 느낀다. 좋은 작가는 그 사이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알고 있다. 그런데 더 좋은 작업이 있으니, 그것은 그 사이의 공간을 소요하는 것이다. 그 경계를 즐기는 것이다. 자신에게 침잠해 있던 발걸음을 예술이라는 노스탤지어로 조금씩 옮기는 작가, 그리고 그 중간에서 아무렇지 않은 듯 멈출 수 있는 작가. 자아와 미술의 경계, 그 사이. 지금 이정훈은 산책중이다. 그 산책이 어디에서 시작되어야 하는지, 어떤 지점에서 멈춰야 하는지 알기에 걱정이 없다.

 

윤동희 / 북노마드 대표, 미술무크지 <debut(데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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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

2006년부터 작업한 투각도자기와 철화, 상감, 박지, 조화기법으로 작업한 분청사기 작품들